전쟁에서 싸울 수 없는 능력자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다사카의 망나니, 이글 홀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어느 전투에서 양 눈의 시력을 상실한 이글 홀든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죽은 것도 아닌데, 제대로 싸울 수는 없는 상태라 지하 연합 측에서는 상당히 곤란했다. 본인은 시각이 없어도 여전히 전투를 계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지하 연합 수뇌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이자는 의견도 나왔다. 안타리우스 측에 생포되어 정보를 유출시키느니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는 것이 의견의 요지였다. 당연히 기각되었다. 진상이 알려졌다간 다이무스 홀든을 위시한 헬리오스와 홀든 가는 물론, 벨져 홀든이 단장으로 있는 검의 형제 기사단까지 적대시 해야하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글의 처우를 두고 곤란하고 있던 차에 때마침 벨져가 지하 연합을 방문했다.
“여기에 내 동생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명과 같이 아무런 예고 없는 방문이었다. 이글이 시력을 잃은 것은 다들 쉬쉬하고 있던 일인데 어떻게 외부인인 벨져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모든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지 그는 이글을 자신이 보호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지하 연합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이글에 대한 모든 처우는 벨져에게 넘어갔으며, 그 과정에서 이글의 의사는 개입되지 않았다. 만약 벨져가 그를 어떻게 취급할지 알았더라면 이글은 결코 벨져를 따라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다이무스 홀든이 이글의 신변을 보호하고 싶다며 찾아왔지만, 이미 벨져가 이글을 데리고 간 뒤였다.
* * *
낮밤을 가리지 않는 어둠은 이글에게 낯선 것이었다. 인지가 가능하기 시작했던 오랜 과거부터 그의 우수한 신체 능력은 불빛없는 밤에도 사물의 윤곽을 그려냈다. 이글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주는 공포를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전투 중 시력을 상실하지만 않았다면 앞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것은 쾌검 이글의 죽음과 동일한 사건이었다. 몸의 근육에 녹이 슨 것도, 시력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이 마비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글은 더 이상 원거리에서 저격하는 총알을 발견하고 튕겨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시점에서 쾌검 이글은 제 몫을 해낼 수 없게 되었다. 달릴 수 없는 경주마는 살처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지하 연합은 이글을 죽이는 대신 벨져에게 넘겼고, 그것은 이글에게 새로운 지옥의 시작이었다. 이글은 그곳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벌거벗은 등은 초라했다. 분명한 성적 흔적이 오래된 검상과 단련된 근육을 덮고 있었다. 치부를 가릴 천조차 주어지지 않은 나신은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귀족의 것보다는 사육당하는 짐승의 것에 가까웠다. 무릎을 굽히고 사이에 얼굴을 묻은 이글은 그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구두가 러그를 밟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굽은 등은 동그란 척추 뼈를 튕길 것처럼 움틀거렸다.
"한결같이 어리석구나."
네 아둔함이 날 기쁘게 한다만은,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면 곤란하지. 이글에게 가까이 다가온 벨져는 여상스러운 태도였다. 과하지 않게 구부러진 긴 백발은 채광을 반사하며 빛났다. 언제나 그렇듯이 성별에 무관한 우미의 극치가 벨져에게 깃들어있었다. 그러나 시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외적인 미는 이글에게 무의미했다. 벨져가 이글의 발치에 선 지금까지 이글의 눈동자는 빈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백태가 낀 듯 부옇게 흐려진 눈동자는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아무리 짐승은 교미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서재까지 오다니, 취향하고는.”
벨져는 이글의 도망을 그런 식으로 일축하고는 혀를 쯧, 하고 찼다. 사실 벨져에게 이글의 행동은 약간의 시간과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벨져는 이글이 자택의 구조를 이미 외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글은 어릴 적부터 비상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그것을 쓸모없는 데에 부어버리지만 않았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아마 저택 밖을 빠져나가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나가지는 못하고 고작해야 침실에서 서재로 도망친 것이 몹시 우스웠다.
벨져는 그대로 손을 뻗어서 이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고상한 미소와 다르게 머리채를 잡는 손길은 우악스러웠다. 작게 비명이 터진다. “싫….” …다는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구둣발이 배를 걷어찬다. 날카로운 구두굽이 위장을 후벼 파듯 했다. 이글이 말을 하려고 할 때면 벨져는 그에게 고통을 가했다. 자고로 말 안 듣는 짐승은 체벌이 제일이다. 그것은 벨져의 지론이었고, 또한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급기야 먹은 것 없이 신물만 줄줄 토해내면서도 이글은 처음에 뱉었던 한 음절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먼 이글은 사육당하는 짐승에 가까웠고, 벨져는 지금 상황이 몹시 만족스러웠다.
'글 > 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글 알오버스 진행 (0) | 2015.06.12 |
---|---|
팜님 릭이글 일부 (0) | 2015.05.31 |
릭이글 쓰던거 (0) | 2015.05.15 |
[티엔하랑] 상관 (0) | 2015.05.02 |
[티엔하랑] 찬별님... (3) | 2015.04.30 |